인사동은 오래된 전통 물건들이 도심에서 교환되는 소중한 곳이다. 인사동에는 큰 대로 주변에 미로 같은 골목길이 있다. 미로는 갤러리, 전통공예품점, 고미술품점, 전통다방, 전통음식점, 카페 등이 즐비하다. 특히 인사동의 상점들은 독특한 스타일로 젊은 층뿐만 아니라 중장년층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가운데 갤러리는 인사동의 중심이다.이곳에는 100여 개의 갤러리가 있어 한국화부터 판화, 조각전까지 다양한 전시회를 즐길 수 있다. 대표적인 갤러리로 민속예술의 중심 역할을 한 학고재, 재능 있는 예술가의 본고장이 된 가나 갤러리, 가나 아트센터 등이 있다. 인사동에 있는 유명한 갤러리를 둘러보고 싶다면 박물관의 선화 버스를 이용해 보십시오. 방문객들은 저렴한 가격에 10여 개의 유명한 갤러리를 방..
황남대총(98호 고분군)은 동서 80m, 길이 120m, 높이 25m의 거대한 무덤으로 낙타등처럼 휘어져 있다. 1975년 발굴조사 기록에 따르면 북쪽의 무덤은 여성을 위한 무덤이었고 남쪽의 무덤은 남성을 위한 무덤이었다. 서로 맞물린 암석을 바탕으로 남쪽 무덤을 먼저 조성한 뒤 북쪽 무덤을 합친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는 금관, 목걸이, 팔찌, 곡예지 등 수천 점의 장신구가 발견됐고 무기가 주류였던 남한에서는 2만4900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두 개의 무덤이 붙어 있는 신라 최대의 고분이다.능묘의 능묘는 주벽이 있는 곳까지 조금 파서 그 위에 큰 개울이 놓여 있고, 주벽은 땅에 놓여 있었다. 상자 중앙에는 이중 튜브가 있었다. 유물은 내·외부, 내·외부, 내·외부, 내·외부, 장신구, 대도, 외·간..
대릉원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무덤은 무덤 앞에 대나무 밭으로, 묘문이 세워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서국 사람들이 신라를 침공했을 때, 미추왕릉에서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인이 신라군을 돕기 위해 나왔다고 한다.미추왕은 13대 왕으로 성은 김씨(金氏)이며 알제르의 후손이다. 미추왕은 '삼국지연의 역사'에서 5명의 신하들을 각지에 파견해 백성들의 애환을 들었다. 재위 23년 만에 대릉에 묻혔다." 여기서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14대 왕 때의 일이다. 적 이서국이 쳐들어와 곤경에 처했고, 어디선가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병사들이 나타나 순식간에 적을 격파하여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고 사라졌다. 신라군 병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대나무 잎의 행방을 살피니 미추왕릉 앞에는 대나무 잎이 ..
당시는 황남대총 발굴 전 연습으로 삽질이 시작됐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세상을 들끓게 할 만큼 놀라웠다. 신라 문화의 화려한 보물창고가 태양을 본 것은 천년 만이었다. 우선 천마총은 고분이 어떻게 지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충실한 사례다. 먼저 땅이 고르고 목은 약 40cm 깊이로 파서 어른 크기의 개울석을 깔고, 분지 밑바닥에 진흙을 깔아 15cm 정도의 밑동을 형성했다. 그 위에 가로 50㎝, 높이 40㎝의 개울석을 얹어 일종의 대좌를 만들었는데, 그 위에 동서 6.6m, 남북 4.2m, 높이 2m의 목벽을 세웠다. 목벽이 결국 땅에 깔리는 셈이다. 목벽 위와 주변에 지름 23.6m, 높이 7.5m의 돌을 쌓은 뒤 20cm 두께의 점토를 발라 물이 안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했다. 상자 안에는 길이 2.15mm1..
지금으로부터 천 년 이상을 살아온 노인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시공을 초월한 신비가 더욱 강렬하다. 한울교에는 23기의 고분이 모여 있다.특히 경주의 고분군이 평탄한 표면에 있다는 점은 당시의 다른 지역에 비해 특이하다. 남산 북쪽부터 국립경주박물관 터, 반월성 터까지 황오동,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으로 이어지는 평지에 고분군이 밀집해 있다. 이 가운데 평지 3만8000평에 23기의 무덤이 있는 황남동 대릉원은 고분 규모 면에서 경주에서 가장 크다.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찾기가 매우 쉽다. 풀은 큰 나무 없이 잘 코팅되어 있어 때로는 산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1970년대 공원이 조성되기 전에는 황남대총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능선이 멀리서 보였지만 담장과 무덤 앞쪽 주차시설, 무덤 ..